4) 로마인들의 역사
초장기 로마의 목욕탕은 기원전 2세기 폼페이에 지어진 스타 비 안 탕(Stabian baths)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 탕은 후에 로마제국에 넓게 퍼졌는데 디자인은 대부분 비슷했고 개인 목욕탕이
있는 집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중목욕탕은 매력적이고 아주 흥미로운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당시 로마 공중목욕탕의 유적들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오늘날의 목욕탕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합니다. Caracalla 황제의 목욕탕을 예로 들면 그 규모가 1mile²에 걸쳐 있었으며 풀장의 크기는
가로 1,050 feet, 세로 1,390 feet에 달하였고, 이들 목욕탕의 바닥은 모자이크 타일로 만들어졌으며 벽은
보일러실에서 데워진 공기를 파이프를 통하여 순환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사우나실과 같은 원리를 응용했습니다.
목욕탕에는 탈의실을 갖추고 탕은 기본적으로 냉수 욕실, 미온 욕실, 고온 욕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좀 더 고급스러운 목욕탕은 체육관이나 핀란드식 건 열방, 마사지실 등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욕 후에는
마사지를 받고 정원에서 산책을 즐기거나 독서를 하며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했습니다. 마치 냉탕, 중탕, 열탕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어져 있고 검열 및 습열 사우나, 체력단련실, 스포츠 마사지실 그리고 휴게실을 고루 갖춘 오늘날의
고급스러운 사우나나 찜질방과 유사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로마인들은 수치료를 물리치료의 한 방법으로
이용했습니다. 초기 로마제국의 목욕탕은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 치료 목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남탕과 여탕이 엄격히 구분되었으나 로마제국의 말에 가서는 남녀가 혼욕하게 되었고,
목욕탕은 방탕한 장소로 변해감에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138년경
로마의 힘과 영향력이 쇠퇴하고 기독교인들의 정화 노력으로 다시 혼욕이 금지되면서 조금씩 본래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5) 북유럽의 역사
날씨가 추운 북유럽에서는 기후적인 영향으로 목욕이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몸을 씻는 것
자체를 불필요한 향락으로 여기게 되었고 심지어 극단적인 사람들은 씻지 않은 몸을 자기 육체를 부정하는 신성한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도시 계획가들도 물의 공급과 배수보다는 성을 쌓는 등 도시의 요새화에 더 신경을 씀으로써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청결 수준이 매우 낮았습니다. 휴양과 오락을 모두 제공하는 공중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이런 시설에 가는 것 자체를 창피한 행동으로 여겨 목욕하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대신 향수나 화장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결함으로
인해 전염병이 자주 발생했지만 대부분 사람은 병이 악마 때문이라고 믿고 여전히 청결에 무관심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청결에 대한 개념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종교가 목욕을 자주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6) 북동부유럽의 역사
북동부유럽에서는 핀란드인과 러시아인들에 의해 목욕에 대한 정신적, 사회적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사우나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의 고대 증기욕에서 발전되었는데 핀란드인과 러시아인들은 이를 계승 받아 목재로 작은 방을 만들고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어 증기구름이 방에 가득 차면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젖게 한 다음 몸을 손으로 비벼 마찰하거나,
자작나무 가지로 자기 몸을 세게 쳐서 몸에서 열이 나면 얼음물이나 눈 속에 뛰어들어 사우나 과정을 마쳤고 이들 사우나
기법은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과거 핀란드 사람들은 사우나를 좋아해서 결혼 후 처음 가정을 꾸릴 때부터
필수적으로 사우나를 만들었고 아기들은 사우나에서 태어나고 죽은 이들은 사우나에 눕혀져 있다가 장례식을 치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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